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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여름, 2026

1.이쯤 되면 웬만한 상황들이 처음은 아니다. 아는 종류의 기쁨과 슬픔이 삶을 사는 동안 자작하게 지나간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이쯤 되면 이렇게 알아지는 걸까. 관계 속에서 더욱 그러하다. 새로운 사람들은 끊임없이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오지만, 그들이 들어올 때의 신선함이란 다 거기서 거기다. 그래서 느닷없이 찾아오는 권태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고난에 따르는 고통,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 따위를 능숙하게 잘 다루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그럴 때 어떠한 선을 넘지 않으면서 그것들이 지나갈 때까지 견디는 지구력이야말로 어른의 기본 조건 같다. 그러니 늘 견디면 산다는 말이 참말이다. 불완전한 세상, 엉켜있는 근본적인 문제들, 뜻대로..

유학 이야기 2026.07.08

Second winter storm

보스턴에 두 번째 눈폭풍이 오고 있다. 지난 1월 말 학교가 개강한 지 일주일 만에 이례적인 눈폭풍으로 휴교를 했다. 얼마나 심각하길래 눈이 오기도 전에 휴교를 해버리지, 싶었는데 그럴만하더라. 재난 수준의 눈이었다. 몇 시간 전에 이번에도 휴교를 한다는 비상알람을 받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왜 이런 시기에 학교를 가? 이렇게 추운 겨울부터 개강해서 쯧쯧...' 쉬는 게 그다지 반갑지 않기도 하고 날씨 때문에 꼼짝 못 한 채로 집에 있어야 하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이다. 한국이라면 경험하지 못할 일들에 차츰 적응하니까 익숙해지기보다는 다름에 대한 불편한 마음만 더욱 느껴진다. '역시 여긴 오래 있을 곳이 아니야'.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져가는 생각이다. 적응만 하면 삶이 편해질 줄 알았지만, 적응하고 나니 ..

유학 이야기 2026.02.23

그리움과 여우비

엄마와 통화를 마치면 산책을 가려했다. 그런데 갑자기 투두둑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빗소리 같은데 하늘은 변함없이 맑다. 고개를 빼들고 자세히 보니 여우비다.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첫 비다. 산책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원래 오늘 하버드 스퀘어에 가려는 계획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어쩔 줄을 몰랐을 것이다. 하려던 건 전부 못하게 되었지만, 어째 이 여우비가 반갑다. 버리는 하루 같은 오늘, 이 순간에 뿌려진 비가 가리어져 있던 오늘 하루를 씻어내는 것만 같다. 오늘로 미국에 온지 일주일 째다. 한 달, 어쩌면 일 년 같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발을 딛는 과정은 한 시간이 두배로 체감되는 시간이었고, 시차는 하루의 경계를 무너뜨려 시간을 체감하..

유학 이야기 2025.08.15

보스턴에서 사연을 보냅니다.

Hello, 보스턴에서 사연을 보냅니다. 저는 잘 도착했습니다. 오는 길에 일본에서 탑승구를 못 찾아 잠시 기절할 뻔한 적이 있긴 하지만요. 그래도 잃어버린 짐 하나 없이 무사히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시차적응은 망한 거 같아요. 해가 지기 전에 잠이 들어서,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납니다. 미국도 한국도 아닌 이상한 시간대를 사는 기분이라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차차 적응하겠죠. 한 달 동안 머무는 이곳 목사님 댁에서는 식사 전 항상 다 같이 기도를 하는데, 목사님이 자꾸 저를 시키십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게 왈왈거렸던 거 같고요. 그 이후론 미리 메모장에다가 써놓기도 했는데, 이제 조금 자연스러워진 거 같아요. 다음에 만나면 제가 미국식 식전기도를 하겠습니다. 에이맨.저는 이렇게 적응하..

유학 이야기 2025.08.12

어제도 오늘도 아닌

이상한 시차에 적응한 것 같다. 미국 시간으로 해가 지기 직전에 잠이 들어 해가 뜨기 전에 눈을 뜬다. 몇 시간 더 늦게 자고 일어나야 할텐데, 생각하면서도 몰려오는 잠을 이겨낼 수가 없다. 새벽에 눈을 뜨면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은 한창 낮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화라도 하면 시간은 가겠지만, 모두가 잠든 집에서 행여나 말소리가 소음이 될까봐 선뜻 연락을 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저 이 상태로 몽롱하게 있다 다시 잠이 들어 해가 뜨고 나면 일어나길 바라는 것이다. 많은 답장과 알림을 무시하고, 전화하고픈 마음을 꾹꾹 누르며 다시 잠을 청해본다. 다행이 어느샌가 잠이 들어 눈을 뜨면 아침이다. 혼자 잠시 깨어있는 새벽의 시간. 어제도 오늘도 아닌 시간이 그저 지나가기를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미국에..

유학 이야기 2025.08.12

떠나는 과정, 닿는 과정

잘 도착했습니다. 공항에서 혼자가 된 순간, 내가 짊어지고 있는 짐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리고 이 짐은 미국에 도착해 목사님 댁에만 오면 전부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짐은 미국 땅에 있는 한 절대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기 때문이다. 오롯이 홀로 책임져야 하는 것들의 무게를 체감한 것이다. 나를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나는 잘 떠나왔습니다. 그리고 잘 도착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면서 동시에 나는 잘 지낼 수 있을까요, 라며 엉뚱하게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이러한 작은 의심에 기반한 질문은 내가 가진 불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소하고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이 안 되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아니, 버려지지 않더라도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야 한다...

유학 이야기 2025.08.09

12월의 나는

한 해가 진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산을 넘다 보니 해가 지는 것을 이제야 발견했다. 정신을 차린 날은 정확히 '12월 1일'이었다. 아니, 여유를 되찾은 날이라고 하자. 잃어버린 여유가 다시 일상과 마음에 흘러들어왔다고 인식한 그날, 가장 먼저 몸이 아파왔다. 이제는 아플 차례라는 듯이 잘 걸리지도 않는 감기가 몸살과 함께 찾아왔다. 어찌 보면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아픈 것이 차라리 좋았다. 그동안 나를 어지럽게 했던 모든 것은 타당했고, 그것을 견딘 나는 몸이 아플 정도로 고된 시간을 통과했다고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누군가 이 모든 게 끝나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두문불출할 거예요."라고 답했다. 말하는 대로 된 셈이다. 멍청한 핸드폰으로 허황된 바깥세상을 보는 것도 거의 하지 않았..